[기획] 한국 농업 ODA ③ 기계를 건네는 원조에서, 돌아가게 하는 원조로

농기계 ODA, 현지화·총수명주기비용 입찰·사후관리 설계 필요 성과 재는 잣대, 보급 대수 아닌 ‘농가소득’으로

백철현 기자
승인 2026.09.23 07:37수정 2026.09.23 07:38
한국 ODA의 개선방향(사진 = 제미나이 생성 AI 이미지)
한국 ODA의 개선방향(사진 = 제미나이 생성 AI 이미지)

한국 농업 ODA 1·2편에서는 사업이 끝나면 멈춰 서는 농기계와 성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구조를 짚었다. 문제를 되짚어 보면 해법의 방향도 드러난다. 맞는 기계를 보내고, 처음부터 함께 설계하고, 수명주기를 따져 사고, 사업이 끝난 뒤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이번 편에서는 1·2편의 취재원들과 충북대 농업경제학과 송양훈 교수의 의견을 종합해 한국 농업 ODA 개선점을 차례로 살펴본다.
 

현지 토양에 맞는 기계부터

개발도상국(개도국)에서 한국 농기계가 멈추는 이유로 흔히 A/S 부재가 꼽힌다. 하지만 더 앞선 원인이 있다. ODA 사업에서 필요한 농기계 대수를 정해 주문하면, 업체는 대개 국내에서 쓰던 기계를 그대로 보낸다. 엔진 마력과 구동 방식, 타이어 재질, 차체 폭과 높이가 현지 토양과 재배 방식에 맞지 않으면, A/S망이 있어도 기계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농촌진흥청 안욱현 수출농업기술과장은 “A/S가 문제라는 얘기 가운데 상당수는 애초에 그 나라에 맞는 기계를 보내지 않아 고장 날 수밖에 없었던 경우”라며 “기술 수준은 오히려 낮추고, 내용은 그 나라 환경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어디에 보낼지도 가려야 한다. 송 교수는 한국 농기계가 개도국 여건에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수백 ㏊를 경작하는 중남미 대농장에는 미국·유럽산 대형 장비가 맞고, 아프리카 영세농에게 한국의 첨단 트랙터는 유지비도 감당하기 어려운 ‘오버스펙’이라는 것이다. 송 교수는 기계화율 10% 미만인 저소득국에는 경운기·탈곡기 같은 소형 기계를 마을 단위 임대 방식으로 보급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기계화 수요가 폭발하는 중소득국의 1~5㏊ 규모 중소농 지역이 한국형 중소형 농기계의 ‘스위트 스폿’”이라며 “이곳에 현지화 연구개발(R&D)센터를 먼저 세워 작업기를 현지에 맞게 개조해야 수출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기획 단계부터 한 테이블에

현지화가 사업에 반영되지 못하는 배경에는 흩어진 추진 체계가 있다. 농업 ODA는 외교부·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농림축산식품부·한국농어촌공사 등 산하기관,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코피아), 한국수출입은행, 행정안전부, 산업통상부, 지방자치단체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정작 농기계를 전담하는 공공기관은 없어 한국농기계공업협동조합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기관마다 따로 입찰하다 보니 한 나라 안에서도 기종이 뒤섞이고, 현지 부품 대리점이 자리 잡을 규모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송 교수는 “기계를 사주는 곳, 기술을 가르치는 곳, 고칠 예산과 인력이 따로 놀면서 비싼 농기계가 1~2년 만에 고철로 방치되는 매몰비용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현장에서는 이 틈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상계 전 코피아 볼리비아센터 소장은 “기술 보급 중심인 코피아는 프로젝트당 농기계 구입비가 실질적으로 7000만 원 수준”이라며 “농기계 몇 대만 사도 예산이 바닥난다”고 말했다. 하드웨어 사업을 주로 하는 코이카는 현지 사무소에 농업 전문가가 드물어 농업 과제 발굴이 소장 개인 역량에 좌우된다.

여러 기관이 얽힌 사업에서는 현장 책임자에게 결정 권한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상훈 전 코이카 세네갈 프로젝트 매니저(PM)는 “현장 권한 위임이 잘 이뤄지지 않는 부분은 한국 원조가 국제 동료검토(피어리뷰)에서 받은 대표적 지적”이라고 설명했다.

2024년 11월 KOICA 베트남 혁신적농촌공동체 사업 예비조사로 충북대 송양훈 교수(오른쪽 네 번째)가 참석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24년 11월 KOICA 베트남 혁신적농촌공동체 사업 예비조사로 충북대 송양훈 교수(오른쪽 네 번째)가 참석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해법은 통합의 시점을 앞당기는 것이다. 송 교수는 “통합은 집행이 아니라 사업의 첫 단추인 기획 단계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사전타당성 조사 단계부터 코이카·농식품부·농진청·농기계 전문 기관이 공동기획단을 꾸리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이카·농진청·새마을운동중앙회가 함께 사업 형성에 참여하는 ‘혁신적 농촌공동체 사업’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최저가가 아닌 총수명주기로 평가

한국 예산이 들어간 사업에 제3국 저가 농기계가 들어가는 현실은 업계의 오랜 불만이다. 그렇다고 한국산을 조건으로 거는 것은 답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는 원조 자금으로 공여국 제품만 사게 하는 구속성 원조를 줄이도록 회원국에 권고하고 있고, 한국도 2010년 DAC에 가입하며 최빈국 대상 비구속성 원조 권고를 지키기로 약속했다. 송 교수도 특정 기업에 맞춘 사양을 입찰서에 넣거나 현지에 맞지 않는 고가 장비를 떠넘기는 것은 원조가 아니라 장사라고 선을 그었다.

문제는 규범이 아니라 입찰 방식에 있다. 송 교수는 “제3국 기계가 낙찰되는 것은 비구속 규범 때문이 아니라 납품 최저가 위주의 1차원적 입찰 평가 때문”이라며 “지금은 싸게 납품하고 철수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송 교수가 제시하는 대안은 총수명주기비용(LCC) 개념을 반영한 평가다. 장비 가격 배점을 낮추고 향후 5년간의 부품 조달망과 A/S 운영 계획에 높은 점수를 주면, 한국산을 지정하지 않고도 현지에 오래 머물 의지가 있는 기업이 정당하게 이길 수 있다.

기업이 내놓을 것도 달라져야 한다. 정 전 PM은 세네갈 사업에서 트랙터와 함께 정비 매뉴얼을 만들고 서비스센터 설립을 이끌었다. 그는 “기계 하나로는 국제 입찰에서 경쟁이 안 된다”며 “교육과 매뉴얼, 운영 역량까지 묶은 패키지로 가치를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이 끝난 뒤를 미리 설계

송 교수는 “ODA 사업은 대개 3~5년이면 끝나고, 사업지침과 국가재정법상 한국 예산으로 현지 장비의 사후관리를 이어가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코피아 볼리비아센터는 문을 닫은 뒤 고장이 잦은 부품 목록을 본국에 보냈지만 이를 살 예산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기술자를 한 번 보내 고치는 데만 2000만~3000만 원이 든다. 몇 대 보급해 놓고 기업에 A/S를 기대하는 구조로는 처음부터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는 이를 ‘예산 규정의 한계’라는 변명을 방패 삼은 ‘기획의 빈곤’이라고 진단했다. 지원이 끊길 것을 안다면 사업 기간 안에 유상 수리센터를 운영하거나 임대수익으로 부품기금을 쌓는 수익형 A/S 모델을 심어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 교수에 따르면,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는 무상 공여가 끝나는 시점에 기술협력 사업과 봉사단 파견을 이어 붙여, 은퇴한 정비 전문가가 현지에 머물며 기계를 고치게 한다. 자국 농기계 기업의 현지 딜러와 정비사도 ODA 자금으로 교육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구상이 나온다. 송 교수는 ODA 자금으로 거점에 훈련·정비센터를 짓고 한국 농기계로 현지 정비사를 교육한 뒤, 코이카 ‘포용적 비즈니스 프로그램’(IBS)으로 참여한 기업이 부품 대리점과 유상 수리를 맡는 구조를 제안했다. 중소 농기계 업체들이 공동으로 현지 영업소를 세워 정부 지원으로 몇 년간 실증과 판촉, 수리를 운영한 뒤 조합으로 넘기자는 제안도 현장에서 나온다.

결국 핵심은 규모다. 같은 기종이 일정 대수 이상 모여야 부품 재고와 정비 인력을 유지할 수익이 생기고, 그때부터 A/S는 원조가 아니라 사업이 된다.
 

ODA와 수출이 서로를 끌어주는 구조로

농진청은 볼리비아에서 이 방향을 시험하고 있다. 코피아 볼리비아센터가 남긴 농기계를 바탕으로 5년짜리 트랙터 부착 작업기 현지화 과제를 2026년부터 시작했다. 트랙터는 LS엠트론, 작업기는 중소기업이 맡고, 3년간 볼리비아에서 실증한 뒤 페루 등으로 넓힌다. 이 과제는 ODA 예산이 아닌 R&D 예산으로 진행되고, 코피아의 현지 네트워크만 활용한다. 원조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수출 기반을 닦으려는 설계다.

안 과장은 “지금까지는 ODA가 먼저 가야 한다는 게 고정관념이었다”며 “현지 맞춤형 기계를 먼저 만들어 두면 이후 들어오는 ODA나 수원국 정부의 조달사업에서 곧바로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원조가 끝난 자리에 수출이 들어서고, 그 수출 기반이 다시 다음 원조를 잘 돌아가게 하는 순환이다.

성과를 재는 잣대도 바뀌어야 한다. 2편에서 권택윤 전 농진청 기술협력국장이 지적했듯, 농기계를 몇 대 보냈는지는 성과가 아니다. 송 교수는 “보급 대수는 행정, 가동률은 과정, 최종 성과는 농가소득”이라며 “기계화로 늘어난 경작면적과 줄어든 인건비가 실제 소득으로 이어졌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산이 줄어드는 국면일수록 단발성 기자재 공여를 줄이고, 종자·관개·기계화·수확 후 관리·유통을 한 지역에 묶는 통합형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ODA가 끝난 뒤 수원국 농민이 자기 돈으로 기계를 살 때 부품 구하기 쉽고 수리가 편한 한국산을 스스로 고르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원조를 장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원조가 만든 토양 위에서 정당한 비즈니스가 싹트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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