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B 부산 팸플릿으론 백전백패"… 농기계 수출, '가치사슬·금융' 패키징이 성패 가른다

단품 기계 판매 방식서 벗어나 교육·정비·금융 묶은 '종합 솔루션' 제안해야 ODA 프로젝트 수주 핵심은 현지 농업 '병목 구간(Bottleneck)' 해결이 관건 우즈베키스탄 면화 수확기 잔혹사, 기술혁신 통해 136억 원 부품 수출로 반전

백철현 기자
승인 2026.05.14 09:00수정 2026.07.07 18:48
지난 5월 14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농기계학회 50주년 학술대회 김용빈 개발마케팅연구소장이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5월 14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농기계학회 50주년 학술대회 김용빈 개발마케팅연구소장이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 농기계 및 애그테크 기업들이 글로벌 프로젝트 시장과 개도국 대상 ODA(대외경제협력기금·무상원조) 시장에 진출할 때, 공급자 중심의 낡은 영업 관행을 버리고 '농업 가치사슬(Value Chain)' 중심의 종합 솔루션을 제안해야 한다”고 지난 14일 제주도 한국농기계학회 5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용빈 개발마케팅연구소장이 지적했다.

글로벌 진출을 노리는 국내 농기계 업체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여전히 'FOB 부산(부산항 인도 조건)' 가격이 적힌 팸플릿만 가지고 해외 시장을 찾는 점이다. 현지 웹사이트 유입을 기다리는 마케팅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등 실제 협상 테이블에 나설 때는 바이어의 창고 앞까지 관세와 물류비를 모두 포함한 가격(DDP)이나 최소 CIF 기준의 견적을 즉각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현장에서 도착도 가격을 계산하지 못해 대답을 미루는 것은 수출에 대한 준비와 진심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특히 프로젝트성 수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계 한 대만 파는 방식에서 벗어나 ‘교육 + 정비 + 부품 + 금융 + 운영 플랫폼’을 하나로 묶어 패키지화하는 전략적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

추상적인 ODA 프로젝트 명사, '가치사슬 분석'으로 뚫어야
김 소장은 “국제 원조 시장에서 '농기계 조달 사업'과 같은 직관적인 이름의 ODA 프로젝트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 '농업 생산성 향상 사업'과 같은 추상명사의 형태로 발주된다”고 말했다. 이는 기계의 기술적 우수성만 강조하기보다 비즈니스 관점의 농업 가치사슬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제안해야 수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의 사탕수수 및 설탕공장 모델을 보면, 농장 자체의 수익률(IRR 약 5%)은 공장 수익률(대략 25%)에 비해 턱없이 낮다. 글로벌 디벨로퍼들은 이 갭을 메우기 위해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한국의 EDCF 자금 등 무이자·저리 차관 금융을 엮어 개도국 정부로부터 사업권을 확보한다. 이때 현지 농민들은 농사 기술도 없고 전용 농자재나 농기계도 부족한 상태다. 프로젝트 기획 단계부터 농자재 파이낸싱과 농기계 리스(Lease) 시스템을 가치사슬 안에 묶어 제안하는 기업만이 거대한 ODA 자본의 흐름을 선점할 수 있다.

결국, 농기계의 진정한 가치는 기계 자체의 스펙이 아니라, 현지 농작업 흐름 중 발생하는 '병목 구간(Bottleneck)'을 해결할 때 발생한다.

사회적 가치 해결이 연쇄 수출로… 우즈베키스탄 면화 수확기의 기적
농기계를 통해 현지의 고질적인 사회적 병목을 해결해 준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바로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의 초창기 우즈베키스탄 면화(목화) 수확기 ODA 사업이다.

우즈베키스탄은 대규모 면화 농사를 짓지만 수확기가 2~3주로 매우 짧다. 기존 소련식 기계의 성능 저하로 면화의 40%를 수확하지 못하자, 이를 손으로 따기 위해 어린아이들까지 대거 필드에 동원되면서 '아동 노동 착취'라는 국제적 스캔들로 번졌다. 이 면화를 구매해 지폐를 만들던 한국 기업과 조폐공사까지 글로벌 NGO의 거센 비난을 받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역풍속에서 한국 농기계 기술진은 지나가기만 하면 면화를 100% 수확하는 고성능 시제품을 개발 및 투입했다. 66억 원의 무상 원조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한국산 부품을 기준으로 설계된 덕분에, 결과적으로 136억 원 규모의 한국산 부품 수출이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나아가 유사한 환경의 이웃 국가들(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이 우즈베키스탄의 변화를 보고 구매를 요청하면서, 우즈베키스탄이 한국산 부품을 수입·조립해 주변국에 재수출하는 '우즈베키스탄 건국 이래 최초의 기계 수출 실적'이라는 연쇄 효과까지 만들어냈다.

품목 고집 버리고 금융 상품 선제적 결합해야
글로벌 무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김 소장의 핵심 제언은 두 가지다. 첫째, 공급자 중심의 품목 고집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기계를 만드니 사 달라"는 메커니업 방식은 실패한다.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더라도 현지 국가 정부 및 바이어와 소통하며 그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사업(관수 시스템, 위생 도축 유통 등)에 맞게 솔루션을 유연하게 맞춰 가야 한다.

둘째, 금융 상품의 선제적 결합이다. 기계 단가만 가지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뼈를 깎는 가격 인하 압박만 받게 된다. 수출입금융이나 공적 자금 등 기계에 붙일 수 있는 금융 상품 조건을 미리 파악하고 패키징해 협상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아울러 김 소장은 “동남아시아(아세안) 시장 역시 하나의 동질적인 시장으로 접근해선 안 되며, 유·무상 원조가 모두 가능한 국가, 이미 자체 원조기관을 운영하며 공여국으로 돌아선 국가, 원조 대상에서 제외된 국가를 철저히 분리해 세밀한 맞춤형 글로벌 진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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