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종 하나에 25년…녹색배 ‘설원’을 세상에 내놓다
[인터뷰]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센터 정해원 연구사
배 한 품종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센터 정해원 연구사의 대답은 간명했다.
“대략 25년 정도 걸립니다.”
교배부터 계통 선발, 우량계통 선발, 지역적응 시험, 농가 보급까지. 개발이 끝났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시장에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다시 10~15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는 “과수 품종은 시간이 워낙 오래 걸려서 민간 기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기관이 하는 것”이라며 “딸기 등 일부 품목은 도 농업기술원에서도 육종하지만, 배는 과수 중에서도 기간이 길어 배연구센터에서만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이 개발을 시작한 사람은 대개 퇴직하거나 다른 부서로 옮겨 간다. 정 연구사는 “설원도 그렇다. 제가 육종실에 온 지 10년쯤 됐는데, 제가 처음 뵈었던 분이 그 무렵 개발을 마친 품종이다. 저는 그걸 넘겨받아 새 품종을 만들고, 만들어 둔 품종을 보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남 나주의 배연구센터에서 만난 그는 녹색배 ‘설원’과 ‘슈퍼골드’, ‘그린시스’ 등 세 품종의 보급을 맡고 있다.
녹색 껍질은 오히려 흔하다
배 하면 갈색이다. 제사상에 올리고 선물세트에 담기는 배가 그랬다. 그래서 소비자에게 녹색배는 낯설다. 그런데 육종 현장의 사정은 정반대라고 했다.
정 연구사는 “교배하다 보면 오히려 갈색 과피(껍질)의 비중이 낮고 녹색이 흔하다. 1950년대부터 육종을 이어 왔고, 1980년대에 나온 황금배도 녹색 품종”이라며 “이후로도 계속 이 계통을 써서 육성해 왔고, 그러다 보니 녹색배 중에서 고당도 개체가 많이 선발됐다. 확률적으로 식미가 우수한 녹색 품종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시장 진입은 별개 문제였다. 그가 가장 오래 마음을 졸인 곳은 도매시장이었다. 그는 “도매시장은 다소 보수적인 편이다. 소비자 인식과 선호도 때문에 시장에서도 갈색배를 원한다. 그래서 녹색배가 여기 진입이 가능하겠느냐는 우려 속에 개발했다”며 “그런데 최근 트렌드가 ‘맛만 있으면 된다’는 쪽으로 바뀌었고, 다행히 맛이 워낙 좋다 보니 도매시장에서도 이 품종에 대해 호평해 주고 있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우려는 숫자로 반박됐다. 지난해 9월 도매유통인 시장성 평가에서 설원은 종합평가 우수 이상 90%를 받았다.
생산자가 원하는 세 가지
보급의 열쇠는 결국 생산자가 쥐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생산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급이 될 수가 없다”고 그는 잘라 말했다.
오랜 시간 신고를 재배해 온 농가가 원하는 특성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고 했다. 첫째는 과중이다. 정 연구사는 “배는 아직 적과하고 봉지 씌우는 일이 개당 노동력으로 들어간다. kg 단위로 단가가 나오니 생산자 입장에서는 과중이 크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다음으로는 개화기다. 최근 신고 재배의 가장 큰 기상 리스크가 개화기 저온 피해인데, 설원은 신고보다 개화가 5~7일 늦어 시기적으로 저온을 회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장성이다. 그는 “배는 소비자가 기대하는 저장성이라는 게 있다. 도매로 올라가도 배는 다른 과일보다 오래 머문다. 적어도 상온에서 일주일은 문제가 없어야 생산자가 안심하고 판다. 설원은 과육 경도 자체가 신고의 1.5배 정도로 높아서, 그런 우려가 적은 편”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생산자가 원하는 큰 과실과 시장이 원하는 크기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소매유통인 평가에 참석한 MD(상품기획자)들은 “대과종 자체가 배 산업을 침체시키는 요소”라며 소과종 개발을 주문했다. 정 연구사도 이 지점을 알고 있었다. 다음 타자로 준비하는 품종이 과중 300~400g의 ‘기후1’과 2016년 등록된 껍질째 먹는 ‘조이스킨’(약 320g)이다.
품종 갱신을 가로막는 벽
그럼에도 품종 전환은 더디다. 그는 “농가들에게 쉽게 품종을 바꾸시라고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걸림돌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배 농가의 고령화로 재배 연속성이 끊기면서 갱신 의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임대농이 상당수여서 결정 권한 자체가 없는 경우다. 마지막은 입지다. 정 연구사는 “배는 사과나 단감에 비해 평지에 많이 심겨 있어 개발 구역과 겹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발이 된다고 하면 과수원을 파는 경향이 많다”고 말했다. 여기에 나무를 갱신하면 5년가량 수익이 끊기는 점도 부담이다.
그래서 그가 공을 들이는 대상은 후계농과 청년 농업인, 그리고 맛있는 배를 만들고 싶어 하는 농가들이다. 그는 “20ha를 재배하는 나주의 한 농가는 ‘내가 생산하는 신고를 정작 나는 맛이 없어 안 먹는다, 누군가는 바꿔야 한다’며 2016년부터 품종 전환을 시작했다. 본인 정도 규모는 돼야 경제적 공백기를 감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때 갱신한 나무가 이제 결실을 맺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농가는 아들이 물려받아 온라인 쇼핑몰로 전량을 직접 판매한다. 그는 “도매시장이 알아주지 않아도 소비자가 먼저 알게 되고, 그러면 역으로 도매시장에서 물량을 찾게 된다. 슈퍼골드나 설원 물량이 있으면 달라는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과피 코르크화를 마케팅 도구로 이용한다
설원을 비롯한 녹색배의 최대 난제는 과피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는 코르크화다. 실제로 도매유통인 평가에서 과피색은 ‘우수’ 응답이 한 건도 나오지 않은 유일한 항목이었다.
정 연구사는 “이 특징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이렇게 생겼으면 설원이나 슈퍼골드로 알아보실 수 있다. 코르크층이 과피를 다 덮으면 그게 갈색배다. 과육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재배상 유의점도 짚었다. 그는 “생산자가 신고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품종에 비해 재배가 쉽다는 점이다. 꽃눈 유지성이 좋아 결과지에 꽃눈이 두 개씩 생기고, 그래서 결과지를 6~7년까지 쓴다. 겨울 전정 때 새 결과지를 유인하지 않아도 되니 노동력이 절감된다”며 “설원을 비롯한 신품종은 꽃눈이 1~1.5개라 3~4년 쓰고 다시 유인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30년 뒤를 보는 연구
당장의 보급과 별개로 그의 연구실은 30년 뒤를 본다. 보급과 개발을 투트랙으로 운영하는 이유다. 첫 축은 온난화 대응이다. 그는 “배는 겨울 동안 7.2℃ 이하 저온에 1500시간 노출돼야 이듬해 정상적으로 꽃이 피고 착과한다. 그런데 이상기후로 그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30~40년 뒤면 더 짧아질 수 있다. 이를 대비해 개발한 품종, ‘기후1’은 800~1000시간만 돼도 문제없이 개화한다”고 소개했다. 이미 개발을 마친 품종이다.
두 번째 축은 배 산업 최대 현안인 과수화상병이다. 아직 국내 재배 품종 중 실용화된 저항성 품종이 없어 개발을 진행 중이다. 마지막 축은 색이다. 녹색배에 이어 적색 과피·적색 과육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정 연구사는 “국내 유전자원에는 적색이 없지만 적색 과피는 중국 배에도 있고 적색 과육은 서양에 있다. 그걸 이용해 교배하고 있다. 고당도나 예쁜 과형은 기본으로 가져가고, 거기에 새로운 특성을 얹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학사 출신으로 2016년 농촌진흥청에 입사한 후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원예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배 재배면적이 20년째 줄고 소비 기반이 장기적으로 흔들리는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안타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 연구사는 “안타깝지만 그만큼 더 맛있는 과일이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결국 소비자가 평소에도 찾을 만한 배를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다”면서 “설원과 슈퍼골드 두 품종만 시장에 풀려도 배를 찾는 횟수와 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