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효 칼럼] 한국의 청년 농부, 세계 무대로 가다
베트남 실패 딛고 키르기스스탄으로…청년 농부의 해외 농업 도전기
[서종효 칼럼] 전국청년농업인연합회 서종효 회장(희망토 대표·달서상인스마트팜 시설장)
전국의 청년 농부들은 저마다의 농장에서 하우스 문을 열고 작물 상태를 살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들쭉날쭉한 시장 가격과 해마다 달라지는 날씨 속에서 국내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 그것만으로도 청년 농부의 하루는 충분히 고되고 또 귀합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다 보면 가끔 모종판을 내려다보다가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매일 손으로 만지는 이 농산물들이, 한국에서 익힌 이 농사 기술이 다른 나라 땅에서도 통할까.
낯선 땅, 처음 만져보는 흙에서 우리 손으로 싹을 틔우는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들뜹니다. 거창한 목표나 큰 성공을 바라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국에서 쌓아온 기술과 경험을 들고 바깥을 한번 내다보는 것도 청년 농부가 걸어볼 만한 길입니다.
베트남 달랏의 실패, 해외 농업의 수업료
물론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 첫 해외 농업 도전지는 2019년 베트남 달랏이었습니다. 현지 NGO와 손잡고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현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말과 문화가 다른 것은 각오했지만, 낯선 기후와 환경에서 생기는 여러 변수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짐을 싸는데 허탈했습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가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어온 한국인 선배 농부들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선배들은 현지에서 농사를 시작하며 겪은 시행착오와 자리를 잡기까지 준비해야 했던 것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됐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해외 농업을 제대로 알기 위해 치른 수업료였다는 것을요.
키르기스스탄 네 번의 방문, 흙 위에서 통한 마음
다시 해볼 기회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에서 왔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90% 이상이 산악지대여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도 불립니다. 만년설이 녹은 맑은 물이 흐르고 땅도 비옥해 농업 잠재력이 큰 나라입니다. 하지만 육묘 기술이나 기후 변화에 대응할 시설이 부족해 수확량을 늘리지 못하는 농가가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비를 들여 현지를 네 번 다녀왔고, 갈 때마다 며칠씩 농장을 돌며 농부들을 만났습니다.
그곳 농부들은 새로운 농업 기술을 정말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야기했지만, 같이 흙을 만지고 묘목을 다루다 보니 긴 설명은 필요 없었습니다. 악수를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우리 재배 노하우가 이곳 농부들에게는 살림살이를 바꿀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한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게 그때만큼 뿌듯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 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참여해 국제개발협력 사업의 행정과 실무를 하나씩 배웠습니다. 오는 11월에는 해외농업자원개발협회의 ‘민간 환경조사 사업’ 지원을 받아 키르기스스탄을 다시 방문합니다. 이번에는 시장 조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꼼꼼히 따져볼 계획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저만의 해외 농업 지도를 한 칸씩 채워가는 이 일이 요즘 제게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밖에 나가 보니 보인 우리 농업의 힘
해외 농장을 다니며 오히려 제 농장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육묘 관리나 시설 운영이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 보니 우리가 무엇을 가졌는지 더 잘 보였습니다. 해외 농업은 남을 돕는 일이기 전에 내 농사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KOICA에는 대한민국 해외봉사단 ‘월드프렌즈코리아’(World Friends Korea)가 있습니다. 청년 농부들에게도 ‘월드파머스코리아’(World Farmers Korea) 같은 이름이 하나 있으면 어떨까요. 한국의 농업 기술과 정성을 들고 세계 곳곳의 농부들을 만나, 함께 흙을 일구는 청년 농부들 말입니다.
해외로 나가는 일을 사명감이나 의무처럼 무겁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공들여 키워온 농업을 다른 나라 농부들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도 찾아보는 일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현장을 지키는 청년 농부들을 응원합니다. 언젠가 다른 나라의 밭에서 만나 함께 씨앗을 심을 날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