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농촌소멸 시대, 농업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자
[특별 기고] (전) 중남미전문외교관 박선태 박사(페루 Trujillo 국립대학교 명예교수)
“농촌이 소멸 위기다.” 수십 년째 반복돼 온 경고다. 농가 인구는 계속 줄고 고령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24년 농림어업조사에 따르면 농가 경영주의 65세 이상 비율은 69.7%에 달하지만, 40세 미만은 0.5%에 불과하다. 그동안 정부는 청년농 육성과 귀농·귀촌을 장려해 왔다. 농가 지원, 농업 기술 보급, 농업기반시설과 정주 여건 개선에도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정책을 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농촌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계속되고 있다. 국가 전체의 인구 구조가 급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농촌소멸을 여전히 ‘거주 인구수의 감소’라는 잣대로만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한지 한번 생각해 볼 때다.
농촌 인구와 농업 생산능력은 같은 것일까
유럽의 농촌을 가보면 넓은 들판 사이로 농가가 드문드문 자리 잡은 풍경을 종종 만난다. 사람은 많지 않지만, 농지는 잘 경작되고 주변 환경은 쾌적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농촌이 소멸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농촌의 지속 가능성과 농업 생산능력을 인구의 많고 적음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농지를 집적하고 규모화하면서 기계화·자동화·스마트농업을 확대하면 더 적은 인력으로도 넓은 농지를 경작하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자율주행 농기계와 데이터 기반 스마트농업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구 감소 시대에는 농촌에 몇 명이 사는가와 함께 누가 농업을 담당하고 어느 정도의 생산능력을 유지할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고령농의 은퇴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영농을 누가 이어갈 것인가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내국인 청년들이 스마트농업과 시설원예, 고부가가치 농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도록 지원하는 한편, 국내 인력 확보가 어려운 지역과 품목에서는 농업 기술을 갖춘 젊은 외국인이 가족과 함께 장기 정착해 영농을 이어갈 수 있는 길도 열어볼 만하다. 계절적인 일손 부족을 보충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업을 지속해서 경영하고 지역사회에 뿌리내릴 영농 인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
농지면적에서 식량 생산능력으로
농지정책 역시 ‘물리적 면적의 보전’과 함께 ‘실질적 생산능력의 확보’를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 농지가 아무리 넓게 남아 있어도 경작할 사람이 없거나 국가적으로 필요한 작물이 생산되지 않는다면 식량안보에 기여하는 데 한계가 있다. 농업인의 입장에서도 같은 농지라면 수익성이 높은 작물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국가적으로 필요한 주요 작물의 생산을 일정 수준 유지하려면 농지 보전과 함께 농업인이 지속해서 생산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식량안보를 바라보는 순서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국민에게 필요한 주요 먹거리를 품목별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것인지 먼저 살펴보고, 그중 국내에서 유지할 필요가 있는 생산능력을 판단한 뒤 이에 맞춰 농지와 인력, 기술과 정책 지원을 함께 설계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식량안보에 필요한 우량농지와 주요 생산지역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용수·기반시설, 스마트 기계화, 공익직불금과 계약재배 등의 정책 수단도 더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농지 전수조사 역시 이러한 미래 농업지도를 그리는 토대로 활용됐으면 한다. 단순히 소유와 이용 실태, 위법 행위를 가려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지역을 장기적인 주요 생산기반으로 유지할 것인지, 어디에서 농지 집적과 규모화가 가능한지까지 파악해야 한다. 특히 농지 투기 방지와 우량농지의 철저한 보전을 기본으로 하되, 도시화와 파편화로 농업적 기능이 크게 약화된 지역에서는 농업적 가치와 미래의 생산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살펴 현실적인 공간 정비와 활용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국내 생산만으로 모든 먹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도 함께 보아야 한다. 국내에서 지켜야 할 생산기반을 충실히 갖추면서 구조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안정적인 해외 공급망으로 보완해야 한다. 과거의 단순 해외 경작을 넘어 장기구매계약, 사일로, 항만·운송망, 현지 유통망을 연결하는 ‘해외 식량 플랫폼’으로 개념을 넓혀볼 수 있다. 아울러 곡물과 사료, 축산과 수산을 아우르는 국가적 식량 공급망을 통상·투자·외교·공적개발원조(ODA)와 연계해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운용할 공급망 전문인력도 체계적으로 키워가야 한다.
농촌소멸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구와 농지면적이라는 숫자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살고 싶은 쾌적한 농촌을 가꾸면서 국민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확보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함께 갖추는 것이 더 본질적인 과제일 수 있다. 이번 농지조사가 단순한 실태 파악을 넘어 향후 20~30년 대한민국이 어느 지역에서 어떤 농업을 유지하고 필요한 먹거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확보할 것인지, 미래 농업지도를 다시 그리는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