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규철 칼럼] K-농기계, ‘가성비 수출’을 넘어 현지 산업 생태계로
내수 한파와 관세 장벽을 넘어 자율주행·현지화·A/S·인력 양성을 묶는 패키지 전략
[남규철 칼럼] 한국농기계공업협동조합 남규철 부장
국내 농기계 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심상치 않다. 2025년 국내 농기계 판매량은 2만 803대로 전년보다 4.7% 감소했다. 2021년 3만 4727대와 비교하면 4년 만에 40.1% 줄어든 수치다. 농기계 판매량은 5년 연속 감소했다. 농가 인구의 고령화와 농작업 대행 확대, 농자재 가격 상승과 농업소득의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판매 금액은 대형 기종 비중 확대와 제품 가격 상승으로 소폭 증가했지만, 판매 대수 감소는 국내 산업 기반이 빠르게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수시장만으로 기술개발과 생산 기반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면서 해외시장 개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됐다.
수출 역시 외형만 보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2025년 우리나라 농기계 수출은 약 13억 6700만 달러로 증가했지만, 전체 수출의 70% 이상이 미국 시장에 집중돼 있다. 주력 품목도 100마력 미만의 중소형 트랙터에 편중돼 있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북미 시장에서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성장했지만, 미국의 상호관세와 철강·알루미늄 관련 관세 부담이 겹치면서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기존 강점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 판매 감소와 관세 장벽을 농기계 산업의 쇠퇴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세계 농기계 시장은 오히려 노동력 부족과 식량안보, 기후변화 대응, 정밀농업 확산을 배경으로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는 아시아·태평양 농기계 시장이 2025년 1125억 달러 규모에 이르렀으며, 2026년부터 2035년까지 연평균 6.8%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세계 농기계 시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경쟁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가격경쟁력’에서 ‘기술·서비스 경쟁력’으로
글로벌 농기계 기업들은 이미 단순한 기계 제조사를 넘어 로봇·데이터·농업 서비스 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자율주행 트랙터와 농작업 로봇, 인공지능 기반 작업 경로 생성, 수확량 예측, 원격진단과 예방정비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인공지능 기업, 로봇 기업, 농작업기 제조업체 및 연구 기관과 협력해 자율주행 트랙터와 지능형 농기계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는 관세로 약화된 가격경쟁력을 기술경쟁력으로 극복하기 위한 바람직한 변화다.
다만 자율주행 트랙터 한 대를 개발하는 것만으로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농기계는 일반 소비재와 달리 토양과 기후, 재배작물, 경작 규모, 농법에 따라 요구되는 성능이 다르다. 아무리 우수한 장비라도 현지 농업환경에 맞지 않거나 고장 발생 시 부품과 기술 인력을 구할 수 없다면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기계 자체의 성능뿐만 아니라 현지 적응성, 유지관리, 운용 인력, 데이터 활용 능력까지 포함하는 ‘전체 농작업 시스템’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출의 단위를 ‘제품’에서 ‘산업 생태계’로 바꿔야 한다
이제 농업기계·자재의 해외 진출을 완성품 몇 대를 판매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 농업의 생산성과 자립 역량을 함께 높이는 패키지형 진출로 전환해야 한다.
첫째, 현지 농업환경에 적합한 장비를 공동으로 개발해야 한다. 동남아시아의 다습한 논농업, 중앙아시아의 대규모 밭농업, 중동의 고온·건조 환경, 아프리카의 소규모 영농은 요구하는 농기계가 서로 다르다. 국내에서 개발한 장비를 그대로 판매하기보다 현지 작물과 토양, 연료 품질, 정비 수준을 고려해 출력과 작업기, 냉각장치, 전자제어 시스템을 조정해야 한다.
둘째, 현지 실정에 맞는 성능평가와 실증 체계를 갖춰야 한다. 일정 기간 실제 농작업에 투입해 내구성과 작업 효율, 연료소비량, 농작물 수확량 변화를 검증해야 한다. 여기서 확보한 운용데이터를 제품 개선에 다시 반영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진정한 현지화가 가능하다.
셋째, 부품 공급과 A/S 체계를 제품 판매와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 농번기에 장비가 멈추면 농가의 피해는 일반 산업기계보다 훨씬 크다. 주요 부품의 현지 비축과 순회 정비, 원격진단, 현지 정비 인력 양성을 결합해야 한다. 해외시장에서 K-농기계의 평판은 최초 판매보다 고장 발생 이후의 대응에서 결정된다.
넷째, 농업인과 기술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훈련이 필요하다. 자율주행과 정밀농업 기술은 장비를 공급하는 것만으로 정착되지 않는다. 운전자 교육, 정비사 양성, 데이터 분석과 농작업 계획 수립까지 현지 인력이 스스로 수행할 수 있어야 기술이 지속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을 한곳에 모은 ‘공단형·거점형 공동 진출 모델’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대규모 생산시설을 건설하기보다는 공동 전시장과 실증 농장, 부품창고, A/S 센터, 교육장을 갖춘 진출 거점에서 시작해 수요에 따라 조립과 부품생산, 현지 장비개발 기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이다.
트랙터와 작업기, 시설농업, 관수장비, 농업용 로봇, 데이터 플랫폼을 생산하는 국내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진출하면 비용과 위험이 커진다. 공동 거점을 활용하면 중소기업도 현지 시장 정보와 물류, 인증, 실증, A/S망을 공유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각자의 기술을 결합해 하나의 한국형 농업 솔루션을 만드는 산업 생태계가 필요하다.
국내시장도 ‘소유’에서 ‘서비스’로 전환해야 한다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내시장도 안정적인 실증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농기계 판매 감소의 배경에는 고령농가 증가와 함께 농작업 대행 확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농기계 시장이 단순한 소유 중심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역농협과 영농조합법인, 농작업 대행업체가 고성능 농기계를 공동으로 운용하고, 농가는 필요한 작업에 대해서만 비용을 지불하는 서비스형 농업 모델을 확산할 필요가 있다. 자율주행 농기계와 농업로봇도 개별 농가에 판매하는 방식보다 농작업 대행 서비스와 결합할 때 소농 중심의 국내 농업구조에 더 빠르게 정착할 수 있다.
국내에서 축적한 서비스 운영 경험은 소규모 농가가 많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시장에도 적용할 수 있다. 국내 농촌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해결책이 해외시장에서는 새로운 수출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Made in Korea’를 넘어 ‘Made with Korea’로
정부의 지원 방향도 개별 제품개발과 전시회 참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자율주행과 인공지능 기술의 공동개발, 해외 실증과 인증, 수출금융과 보험, 공동 A/S망과 부품센터 구축 등 기업들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기반을 보완해야 한다.
기업도 단기적인 판매 실적보다 장기적인 시장 신뢰를 우선해야 한다. 현지 기업과 공동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정비 인력을 양성하며, 현장에서 확보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농기계 제조업체와 작업기·부품업체, 소프트웨어 기업이 함께 진출하는 협력형 수출구조도 필요하다.
‘Made in Korea’가 한국에서 잘 만든 제품을 의미한다면, ‘Made with Korea’는 현지 파트너와 함께 설계하고, 함께 운용하며,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를 의미한다.
K-농기계가 세계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계를 파는 나라를 넘어 농업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내수 한파와 관세 장벽을 넘어서는 해답은 더 싼 제품이 아니라, 자율주행과 인공지능, 현지화와 A/S, 교육·훈련을 하나로 묶은 신뢰의 생태계에 있다.
이제 K-농기계 수출의 목표를 ‘몇 대를 팔았는가’에서 ‘어떤 농업 생태계를 함께 만들었는가’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Made in Korea’를 넘어 ‘Made with Korea’로 나아가는 K-농기계의 새로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