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유신 칼럼] 밭에서 멈추는 AI 농기계, 해법은 현장 검증이다
- 검정·인증 혁신에서 전주기 생산성과 APC 연계까지 -
[전문가 칼럼] 경북대학교 하유신 밭농업기계개발연구센터장
먼저 한국농업기술신문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기후 위기와 농업 인구 감소, 농촌 고령화라는 복합 위기 속에서 기술 중심의 현장 검증형 솔루션을 표방하며 출범하는 본지의 행보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피지컬AI와 자율주행이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는 지금, 기술의 속도와 현장의 속도 사이에 놓인 간극을 줄이는 일은 우리 농산업이 반드시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다.
기술은 빠른데, 현장까지 가는 길은 멀다
농업용 자율주행과 AI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으나, 실제 밭에 안착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다품종 소량 생산, 소규모와 경사지 필지, 수억 원의 투자 비용, 부족한 정비 인프라가 첫 번째 벽이라면, 빠른 기술 변화의 속도를 검정·인증의 보급 연결 구조가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적 시차가 두 번째 벽이다. 연구 개발 이후의 통로인 검정, 실증, 보급, 금융을 더 촘촘히 연결하는 제도 설계가 시급하다.
검정 체계의 국제 정합화 및 현장 검증의 제도화
첫 번째는 농기계 검정 체계의 국제 정합화다. 우리나라는 이미 농촌진흥청이 OECD 트랙터 시험코드 의장국의 위상을 갖고, 한국농업기술진흥원이 국제공인시험기관으로서 검정을 수행하며, 신기술농업기계(NET) 인증 등 국제 수준의 체계를 운영해 왔다. 이 토대 위에서, 안전성은 공공이 책임지는 법적 검정으로 유지하되 성능 부문은 기업 책임과 시장 검증의 비중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OECD Code 2, Code 4 성적서 보유 기종의 중복 시험 면제와 축소, 그리고 전동화, 자율주행, 로봇 농기계에 대한 검정과 신기술 인증 연계 One-stop 평가와 신기술 전용 패스트트랙 도입이 필요하다. 이는 정식 검정을 우회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증 현장에서 작업 성능, 고장 빈도, 안전사고, 노동 시간 절감 데이터를 의무 기록하고 그 결과가 검정, 융자, 보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만드는 현장 검증의 제도화 제안이다. 곧 수립될 제10차 농업기계화 기본계획에 핵심 과제로 명문화되어야 한다.
사람 중심 UX와 안전은 선택이 아닌 기본 사양
두 번째는 사람 중심 UX와 안전 기능의 통합 설계다. 농촌 현장의 사용자는 연구실의 개발자가 아니라 고령, 여성, 신규 농업인과 외국인 계절근로자다. 큰 글씨, 음성 안내, 원터치 제어, 자동 고장 진단, 원격 모니터링은 부가 기능이 아닌 기본 사양이 되어야 하며, AI 기반 장애물 감지, 비상 정지, 전복 방지는 설계 단계부터 내장되어야 한다. 농기계 사고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농업인에게 더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덜 위험하게 설계된 기계를 보급하는 것이다.
밭농업기계화 2.0 — 표준화를 넘어 전주기 생산성으로
세 번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밭농업기계화 1.0이 기계 작업에 맞춰 두둑 폭, 재식 간격, 작목 배치 등 표준화 재배 체계를 만드는 단계였다면, 필자가 제안하는 밭농업기계화 2.0은 그 표준화의 기반 위에서 생산성과 품질, 수확 후 처리까지 함께 끌어올리는 단계다. 핵심은 기계를 한 대 더 보급하는 데 있지 않다. 파종이 쉬운 재배 방식으로 바꾸고, 그 재배 방식이 제초, 관수, 수확, 예건, 저장, 출하와 끊기지 않도록 묶어 전주기 생산성을 높이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마늘은 2.0의 필요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목이다. 기계화 관점에서 무멀칭이나 비닐 조기 제거는 분명히 유리하지만, 재배 방식만 바꾼다고 끝나지 않는다. 무멀칭으로 가면 발아 및 활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추가 관수, 잡초 경쟁을 줄이기 위한 제초 체계 보완, 양분 효율을 위한 깊이거름주기가 함께 따라와야 한다. 필자가 현재 책임을 맡고 있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마늘 기계화 표준모델 실증 연구과제 역시 바로 이 문제 의식 위에 서 있다. 농촌진흥청도 무멀칭 마늘을 기계화에 유리한 기술로 평가하면서, 생산성 보전을 위해 재식밀도, 관수, 두둑 시비를 보완하고 잡초 문제는 봄철 생육기 대응 제도와 연계해 풀어가겠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멀칭 마늘 조건에서 등록 약제, 사용 시기, 잔류 시험 데이터를 축적해 PLS 체계 안에서 현장에 맞는 제초제 운용 기준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무멀칭 재배의 현장 확산에 맞춰 농작물재해보험의 인수 기준과 보장 체계도 함께 정합성을 점검해야 농가가 안심하고 재배 방식을 전환할 수 있다. 표준모델 실증에서 축적된 데이터는 바로 이러한 제도 정비의 근거 자료가 되어야 한다.
주산지 패키지 실증과 APC 연계가 2.0을 완성한다
밭농업기계화 2.0은 전국 일괄 보급이 아니라 작목별 주산지 패키지 실증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늘, 양파, 감자, 고구마, 콩 등 주산지 형성과 기계화 병목이 뚜렷한 작목을 중심으로, 파종·정식–피복(또는 무멀칭)–관수·제초–방제–수확–예건·저장–APC 출하까지 하나의 전주기 패키지로 실증하고, 평가 지표도 단위 공정 성능을 넘어 노동 시간, 수확 손실, 상품률, 저장 손실, 농가 소득 변화까지 포함해야 한다.
특히 수확후관리와 APC(농산물산지유통센터)는 2.0의 부속 영역이 아닌 핵심 구성 요소다. 마늘만 보아도 기계 수확 이후 줄기 절단, 흙 털기, 예건, 저장으로 이어지는 공정이 끊기면 앞단의 파종 및 수확 기계화 효과는 그만큼 줄어든다. APC가 표준화 된 산물을 받아 일괄처리하고 그 데이터를 다음 시즌 재배, 기계화 계획으로 환류시킬 때, 비로소 재배에서 유통까지 하나의 데이터 사슬로 작동한다.
현장이 검증한 기술이 한국 농기계 산업의 경쟁력이다
피지컬AI 시대의 농기계 경쟁력은 알고리즘이나 사양이 아니라 실제 밭에서의 안정성, 고령 농업인의 사용성, 수확 후 공정까지의 연결성으로 결정된다. 정부와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진흥원은 국제 기준에 맞춰 검정, 인증, 보급의 연계를 단계적으로 고도화하고, 단위 공정 위주의 사업 구조를 주산지 전주기 실증 중심으로 전환해 가야 한다. 기업은 고장 나지 않고 쉽게 쓰이며 안전하게 작동하는 기술을, 학계는 그 기술이 생산성, 안전, 소득 개선으로 이어지는지 객관적인 검증을, 국회는 농작업 안전과 농기계 산업 육성의 제도적 기반을 책임져야 한다. 농업의 미래는 가장 빠른 기술이 아니라 현장이 검증하고 전주기가 연결된 기술의 손에 달려 있다. 본지의 창간이 대한민국 농산업 도약의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