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의 삐딱선] 상생기금 1조 원 약속 팽개친 대기업…‘진짜 상생’으로 답하라
시장 개방 속에 적잖은 피해를 입은 국내 농업의 최소한의 손실보상인 ‘농어촌 상생협력기금.’ 10년간 1조 원을 모으겠다던 국가적 약속은 대기업의 외면 속에 목표액의 약 32%인 3207억 원에서 멈춰 섰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부 재정 7000억 원 투입 방안 검토를 지시하며 물꼬를 텄지만, 이는 정부의 정책 실패 자백이자 대기업의 무책임에 대한 경종이다. 기금이 구색 맞추기식 예산 지원에 그치지 않고 스마트농업 전환(AX)과 농가 실질 소득 증대로 이어지려면, 이제 기업과 정부가 농촌 현장에 제대로 답해야 한다.
10년째 헛바퀴 돈 1조 원 약속…개방 희생양 농촌에 남은 건 ‘32.1%의 헛공약’
대한민국 농축산업 역사는 ‘잔혹한 개방의 피해자’다. 우루과이라운드(UR)부터 한·칠레, 한·미, 한·EU, 한·중 FTA에 이르기까지 제조업 중심의 수출길을 열어주기 위해 농축산물 시장은 매번 희생양으로 내던져졌다. 외국산 농축산물의 파상공세 속에 우리 농민들은 생산비 폭등과 가격 폭락이라는 이중고를 온몸으로 견뎌 내야 했다.
정부가 2017년 출범시킨 농어촌 상생협력기금은 바로 이 불균형을 보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FTA 수혜 기업들이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총 1조 원의 기금을 조성해 농어촌의 체질 개선을 돕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강제성 없는 자율 출연이라는 허점은 기업들의 무관심과 책임 회피로 이어졌다. 기업들이 철저히 기금 납부를 외면한 결과,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인 돈은 3207억 원(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 자료·2026년 6월 기준)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업무보고 자리에서 “선택이 아니라 약속이었고, 신뢰의 문제”라며 정부 차원의 7000억 원 책임 방안을 지시한 것은 다소 늦은 바가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국회에 정부 예산안을 제출하는 오는 9월 2일(회계연도 개시 120일 전)까지 2027년도 정부 예산안에 이를 반영하고, 정부와 국회는 농업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실효성 있는 집행 계획을 확정 지어야 한다. 이에 농림축산식품부 전한영 농촌정책국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는 방법과 기업들이 상생기금에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 모두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선심성 행사·상품권 탈피…‘AX·스마트농업’ 고부가가치 인프라에 집중해야
대통령이 재원 마련을 지시한 만큼 이 재원이 현장에서 어떻게 쓰이느냐도 핵심이다. 농어촌 상생기금 용도는 △농어업인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장학사업 △의료 서비스의 확충, 문화생활의 증진 등 농어촌 주민의 복지 증진에 관한 사업 △정주 여건의 개선, 경관 개선 등 농어촌 지역 개발 및 활성화 사업 △농수산물 생산, 유통, 판매 등의 민간기업과 농어촌·농어업인 간 공동협력사업 △농업협동조합중앙회 및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상품권 사업으로 명시됐다.
하지만 상생기금 활용처는 지자체 일회성 행사 지원이나 단순 상품권 발행 등 선심성 사업에 치우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후 위기와 고령화, 인력난으로 고사 직전인 농촌 현장이 체질을 바꾸려면 인공지능 전환(AX), 밭농업 기계화, 스마트농업 확산, 유통 구조 개선 등 고부가가치 기반 시설 구축에 예산이 집중돼야 한다. 지속 가능성을 위해 농업·농촌·농민에게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의 한계로 지원이 어렵다면 관련 규정 개정도 병행해야 한다.
대기업 의무 출연 제도화와 현장 중심 집행이 해법
정부가 부족분을 재정으로 메우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정부가 부족분 7000억 원을 조달하는 것은 상생기금의 모금 취지에도 어긋난다. FTA로 막대한 이익을 누린 수혜 기업들이 기금 출연에 의무적으로 동참하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기업의 농어촌 상생협력기금 출연 실적을 실질적인 인센티브와 페널티로 연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기금 집행 방식은 현장 농민의 눈높이에 맞춰져야 한다. 고령 농업인도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스마트팜 제어 기술 보급, 청년 농업인의 영농 정착을 위한 초기 스마트 온실 지원, 농가 실질 순이익을 높여주는 유통 비효율 개선 등에 자금을 활용해야 한다. 정부가 물꼬를 튼 7000억 원이 단순한 ‘농심 달래기용 예산’으로 유실될지, 농업 구조 전환의 확실한 마중물이 될지는 향후 정밀한 사업 설계와 기업의 진정성 있는 응답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