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농(農)담'] 로봇 한 대보다 협동조합 하나, 유럽식 공동 농업기술(애그테크)의 힘
[글로벌 '농(農)담' : 미래 농업을 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럽사무소 김기철 소장
유럽의 농업박람회에 가면 최첨단 장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스스로 잡초를 제거하는 로봇, 과수의 꽃과 열매를 세어 비료를 달리 주는 장비, 가축마다 사료량을 조절하는 인공지능 시스템까지. 그러나 전시장에서 농장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비싸고 사용 기간은 짧으며, 고장 나면 수리할 사람이 없고, 데이터가 기존 장비와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첨단 농기계만큼, 그 기계를 함께 쓰게 하는 조직이 중요하다.
기계를 나눠 쓰는 조직, CUMA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의 농기계공동이용협동조합 'CUMA'다. 2025년 기준 프랑스 전역에 9200여 개가 있고, 농민 18만 2000명이 참여한다. 프랑스 농민의 거의 절반이다. 조합원들은 트랙터나 수확기 뿐만 아니라 정밀 파종기, 기계 제초기, 퇴비화 시설 같은 값비싼 설비를 공동으로 구입한다. 1400개가 넘는 조합은 직원도 직접 고용해 운전, 정비, 작업 일정과 기술 교육까지 함께 해결한다.
공동 이용의 첫째 장점은 비용이다. 한 농가가 며칠만 사용하는 장비에 큰 돈을 묶어두는 대신, 여러 농가가 이용 시간을 채워 고정비를 낮춘다. 더 큰 힘은 기술 선택에 있다. 조합은 여러 농가의 수요를 모아 새 장비를 실증하고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다. 성능이 확인되면 공동 교육을 거쳐 확산한다. 기술 도입의 위험까지 나누는 셈이다.
독일의 'Maschinenring'도 같은 철학에서 출발했다. 1958년 값비싼 농기계를 혼자 마련하기 어려운 가족농들이 서로의 기계와 노동력을 연결한 것이 시작이다. 현재 230개 지역 조직이 17만 8000개 농가를 잇고 있으며, 이들이 연결하는 농지는 독일 농지의 약 40%에 이른다. 이 조직은 어느 농가나 작업업체가 어떤 장비와 운전 능력을 갖췄는지 파악해 필요한 농가와 연결하고, 농번기 작업과 정산, 교육과 경영 지원까지 제공한다.
쇳덩이에서 데이터로
최근에는 공동 이용의 대상이 기계에서 소프트웨어로 넓어지고 있다. 독일 Maschinenring이 운영하는 디지털 서비스 'MeinAcker'는 필지별 영농일지와 비료 처방, 농작업 의뢰와 정산, 증빙서류를 한 곳에서 처리한다. 지역 조직은 앱만 보급하지 않고 초기 설정과 교육을 돕고, 농업과 규정을 함께 아는 담당자가 문제를 해결한다. 디지털 농업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화면보다 가까운 곳의 믿을 만한 조력자다.
네덜란드의 비영리 협동조합 'JoinData'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착유로봇, 사료업체, 회계사, 정부기관으로 흘러가는 농장 데이터를 농민이 한 화면에서 확인하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얼마 동안 이용할지 직접 승인하거나 철회한다. 농업기술(애그테크)이 확산될수록 데이터의 주도권이 농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장비를 바꾸는 순간 과거 데이터를 쓰지 못하거나 경영 정보가 농민도 모르게 활용된다면, 기술은 자산이 아니라 종속이 될 수 있다.
공동이용은 저절로 성공하지 않는다
물론 공동이용은 저절로 성공하지 않는다. 파종과 수확이 같은 날 몰릴 때 누구에게 우선권을 줄지, 이동·세척·충전시간을 어떻게 계산할지, 고장과 사고의 책임을 누가 질지 미리 정해야 한다. 시간당 또는 면적당 이용료, 예약 변경 규칙, 운전자 자격과 보험, 데이터 소유권도 분명해야 한다. 좋은 협동조합은 친분에 기대는 모임이 아니라 갈등이 생기기 전에 규칙과 전문 인력을 갖춘 경영조직이다.
빌려주는 사업에서 서비스로
한국에는 이미 447곳의 농기계 임대사업소와 농협의 농작업 대행 경험이 있다. 이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기계를 빌려주는 사업'에서 '작업 결과를 제공하는 서비스'로. 자율주행 제초로봇 한 대를 마을에 놓아두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작목과 작업 시기가 비슷한 농가를 묶고, 숙련 운전자를 양성하며, 운송·정비·보험·예약·정산을 하나의 서비스로 만들어야 한다. 농가는 로봇 대신 '밭 1헥타르 제초'나 '과수원 정밀 방제'라는 결과를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 지원의 평가 기준도 보급 대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장비 가동률, 면적당 작업비, 고장으로 멈춘 시간, 절감한 노동시간, 농약·비료 절감량과 농민의 데이터 통제권을 성과로 봐야 한다. 지역농협과 영농조합이 여러 제조사의 장비를 비교 실증하고 공동 데이터 규칙을 만들도록 지원한다면, 소규모 농가도 가장 앞선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유럽식 공동 농업기술(애그테크)의 핵심은 모든 농가가 로봇을 한 대씩 갖는 데 있지 않다. 좋은 기술을 제때 이용하고, 고장을 함께 해결하며, 그 과정에서 생긴 데이터의 권리를 지키는 데 있다. 농업의 미래를 바꾸는 최소 단위는 기계 한 대가 아니라, 기계를 제대로 쓰게 하는 농민들의 조직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