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농(農)담'] 로봇 한 대보다 협동조합 하나, 유럽식 공동 농업기술(애그테크)의 힘

승인 2026.07.30 09:00수정 2026.07.30 13:49

[글로벌 '농(農)담' : 미래 농업을 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럽사무소 김기철 소장

김기철 편집.jpg

유럽의 농업박람회에 가면 최첨단 장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스스로 잡초를 제거하는 로봇과수의 꽃과 열매를 세어 비료를 달리 주는 장비가축마다 사료량을 조절하는 인공지능 시스템까지그러나 전시장에서 농장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비싸고 사용 기간은 짧으며고장 나면 수리할 사람이 없고데이터가 기존 장비와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그래서 유럽에서는 첨단 농기계만큼그 기계를 함께 쓰게 하는 조직이 중요하다.

기계를 나눠 쓰는 조직, CUMA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의 농기계공동이용협동조합 'CUMA'. 2025년 기준 프랑스 전역에 9200여 개가 있고농민 182000명이 참여한다프랑스 농민의 거의 절반이다조합원들은 트랙터나 수확기 뿐만 아니라 정밀 파종기기계 제초기퇴비화 시설 같은 값비싼 설비를 공동으로 구입한다. 1400개가 넘는 조합은 직원도 직접 고용해 운전정비작업 일정과 기술 교육까지 함께 해결한다.

공동 이용의 첫째 장점은 비용이다한 농가가 며칠만 사용하는 장비에 큰 돈을 묶어두는 대신여러 농가가 이용 시간을 채워 고정비를 낮춘다더 큰 힘은 기술 선택에 있다조합은 여러 농가의 수요를 모아 새 장비를 실증하고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다성능이 확인되면 공동 교육을 거쳐 확산한다기술 도입의 위험까지 나누는 셈이다.

독일의 'Maschinenring'도 같은 철학에서 출발했다. 1958년 값비싼 농기계를 혼자 마련하기 어려운 가족농들이 서로의 기계와 노동력을 연결한 것이 시작이다현재 230개 지역 조직이 178000개 농가를 잇고 있으며이들이 연결하는 농지는 독일 농지의 약 40%에 이른다이 조직은 어느 농가나 작업업체가 어떤 장비와 운전 능력을 갖췄는지 파악해 필요한 농가와 연결하고농번기 작업과 정산교육과 경영 지원까지 제공한다.

쇳덩이에서 데이터로
최근에는 공동 이용의 대상이 기계에서 소프트웨어로 넓어지고 있다독일 Maschinenring이 운영하는 디지털 서비스 'MeinAcker'는 필지별 영농일지와 비료 처방농작업 의뢰와 정산증빙서류를 한 곳에서 처리한다지역 조직은 앱만 보급하지 않고 초기 설정과 교육을 돕고농업과 규정을 함께 아는 담당자가 문제를 해결한다디지털 농업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화면보다 가까운 곳의 믿을 만한 조력자다.

네덜란드의 비영리 협동조합 'JoinData'는 한 걸음 더 나간다착유로봇사료업체회계사정부기관으로 흘러가는 농장 데이터를 농민이 한 화면에서 확인하고누가 어떤 목적으로 얼마 동안 이용할지 직접 승인하거나 철회한다농업기술(애그테크)이 확산될수록 데이터의 주도권이 농가 경쟁력을 좌우한다장비를 바꾸는 순간 과거 데이터를 쓰지 못하거나 경영 정보가 농민도 모르게 활용된다면기술은 자산이 아니라 종속이 될 수 있다.

공동이용은 저절로 성공하지 않는다
물론 공동이용은 저절로 성공하지 않는다파종과 수확이 같은 날 몰릴 때 누구에게 우선권을 줄지이동·세척·충전시간을 어떻게 계산할지고장과 사고의 책임을 누가 질지 미리 정해야 한다시간당 또는 면적당 이용료예약 변경 규칙운전자 자격과 보험데이터 소유권도 분명해야 한다좋은 협동조합은 친분에 기대는 모임이 아니라 갈등이 생기기 전에 규칙과 전문 인력을 갖춘 경영조직이다.

빌려주는 사업에서 서비스로
한국에는 이미 447곳의 농기계 임대사업소와 농협의 농작업 대행 경험이 있다이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기계를 빌려주는 사업'에서 '작업 결과를 제공하는 서비스'자율주행 제초로봇 한 대를 마을에 놓아두는 것으로는 부족하다작목과 작업 시기가 비슷한 농가를 묶고숙련 운전자를 양성하며운송·정비·보험·예약·정산을 하나의 서비스로 만들어야 한다농가는 로봇 대신 '밭 1헥타르 제초'나 '과수원 정밀 방제'라는 결과를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 지원의 평가 기준도 보급 대수에서 벗어나야 한다장비 가동률면적당 작업비고장으로 멈춘 시간절감한 노동시간농약·비료 절감량과 농민의 데이터 통제권을 성과로 봐야 한다지역농협과 영농조합이 여러 제조사의 장비를 비교 실증하고 공동 데이터 규칙을 만들도록 지원한다면소규모 농가도 가장 앞선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유럽식 공동 농업기술(애그테크)의 핵심은 모든 농가가 로봇을 한 대씩 갖는 데 있지 않다좋은 기술을 제때 이용하고고장을 함께 해결하며그 과정에서 생긴 데이터의 권리를 지키는 데 있다농업의 미래를 바꾸는 최소 단위는 기계 한 대가 아니라기계를 제대로 쓰게 하는 농민들의 조직일지 모른다.

관련 기사

[백철현의 포커스] ‘알맹이’ 빠진 AFPRO 2026…보여주기식 보다는 ‘진짜 비즈니스’ 판 깔아야[백철현의 포커스] ‘알맹이’ 빠진 AFPRO 2026…보여주기식 보다는 ‘진짜 비즈니스’ 판 깔아야2026.07.29[서종효 칼럼] 고구마 파기에서 조직배양으로[서종효 칼럼] 고구마 파기에서 조직배양으로2026.07.28[이현우의 삐딱선] 상생기금 1조 원 약속 팽개친 대기업…‘진짜 상생’으로 답하라[이현우의 삐딱선] 상생기금 1조 원 약속 팽개친 대기업…‘진짜 상생’으로 답하라2026.07.27[글로벌 '농(農)담'] 미국 농업은 왜 로봇을 선택했나[글로벌 '농(農)담'] 미국 농업은 왜 로봇을 선택했나2026.07.22[김형석 칼럼] 농작물 재배관리 로봇시대가 온다[김형석 칼럼] 농작물 재배관리 로봇시대가 온다2026.07.21[글로벌 '농(農)담'] 유럽은 왜 농업로봇을 농민과 함께 만드는가[글로벌 '농(農)담'] 유럽은 왜 농업로봇을 농민과 함께 만드는가2026.07.15